중관사상의 자아觀 : 용수의 입장은 어떤 법이라도 因緣에 의해 생기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것은 유․무의 규정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거짓의 空性(??nyat?)과 다르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일종의 변증법으로서 '有我'는 물론 '無我'의 고집도 논파하여 제법의 實相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소승적인 실재론을 타파하여 붓다의 연기적 입장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식의 아뢰야식
大乘 가운데에도 공을 말하면서도 '아트만'사상에 가까운 관념을 주장하는 사변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실례를 유식파의 기본 관념인 아뢰야식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뢰야식은 그것에서 우리들의 심신 환경의 일체가 전변하여 나타나는 근본식을 의미하고 그것에 의해 결국 만법은 唯識(vijnapti-m?tra)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현실에서 생존과 환경은 망상에 의해 것짓으로 실체로 존재한다고 고집함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로는 연기법에 의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그 연기법의 근본은 일체 평등의 진여로서 본래 무자성이기 때문에 일체는 모두 무자성의 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識으로 나타난 현실 세계의 성립에 대한 설명에 힘을 덨은 결과, 모양이 있는 것과 같은 實我思想을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식의 근본인 알라야식을 점차로 실체화하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야식에 의하여 일체가 생겨난다.
우리들의 미혹된 세계도 알라야식에 의해 나타나며, 그것의 인식 근거가 되는 것도 알라야식이다.
또 그것은 오염된 마나식(제7식)이 집착하는 대상이 되어 사실상 자아의 기체이며, 윤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자아'는 말할 것도 없이 아집의 소산으로 진실성이 없으므로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알라야식은 세속제에서 논의되는 것으로서 勝義諦(제1의제, 진실의제)의 진여를 증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세속제가 대단히 중요시되어 유정의 心識으로 8식의 轉識을 세워 각각의 功能作用을 자세하게 논의하였다.
여래장 사상의 여래장 : 《大涅槃經》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함을 간절하게 가르친 경전인데, 이 佛性(buddhagotra, buddhadh?tu)을 '자아'라는 말로 표시한다.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 또 마음은 본래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 근본 사상이므로 뒤에 '여래장', '자성청정심'의 이념을 발전시켜서 그것이 佛性, 또는 참된 자아라고도 말한다.
그것은 결코 우리들이 범부 상태에서 고집하는 小我가 아니다. 절대아이고 최고아이며 대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통하는 이데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대체적으로 후기 대승 불교에 이르면서 차츰 아트만 사상에 동화 되어가는 느낌을 주게 한다.
불교는 보통 '무아'의 입장을 취하지만, 그것은 전혀 '자아'를 문제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아'를 문제 삼음으로써 도리어 무아에 대한 주장도 세우게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불교도 역시 인도철학에서 자아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해야 한다. 오히려 여기에서 모든 자아 문제를 종합하여 궁극적으로 철학적 해명을 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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