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거겐(Kenneth Gergen)이라는 학자는 그의 <흡수된 자아: 현대생활과 정체성의 딜레마>라는 저서에서 전자매체의 발달과 사회환경의 급변 때문에 현대인들이 겪어야하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문화생활은 두가지의 자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첫째, 우리는 19세기의 유산으로 낭만주의적(romanticist) 자아관을 이어받았다. 그것은 정열, 영혼, 창조성, 도덕성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 개인의 깊이를 요구한다. 이런 낭만주의적 자아는 헌신적 사랑, 진실한 우정, 인생의 목표 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근대적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낭만주의적 취향은 위협을 받게 된다. 근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적 깊이가 아니라 이성(reason) 또는 합리성에 있다. 근대인은 상식적이고(상식적이라 함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임) 정직하며 신실해야 한다. 그는 교육제도를 신봉하고, 건전한 가정생활과 도덕교육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결혼상대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낭만주의적 자아관과 근대적 자아관 모두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는 사회의 흡수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수많은 목소리로 우리들을 흡수하고 있다. 이 목소리들은 다양한 리듬과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다양성에 점점 흡수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흡수력은 우리에게 수많은 자아관을 제공한다. 이 자아관들은 서로 상충하기도 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조소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같은 자아관의 분열은 신기술과 전자매체들이 제공하는 메시지들이 서로 상충되고 연속성이 없이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자아를 동시에 가지고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진실한 자아(authentic self)라는 개념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린 자아(saturated self)는 전혀 없는 자아(no self at all)가 되고 만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ernism)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흔히들 ‘탈근대주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학계나 지식인층에서는 그냥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에서 모더니즘을 탈피한 새로운 사조로 출발하였습니다. 자아와 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 패러디, 행위와 참여, 임의성과 우연성, 주변적(周邊的)인 것의 부상, 탈장르화, 자기 반영성 등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그 범위가 넓어져서 문학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각종 현상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 다양한 정보의 흐름, 산업사회의 발달로 인하여 발생된 생활양식의 변화, 인간관과 세계관의 다양성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관심있는 학생은 사전이나 문헌을 참고할 것). 위에서 Gergen이 말하는 이성의 몰락, 관점의 다양성, 다양한 자아 등이 현대사회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성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기존(전통이나 근대성) 형식의 탈피, 본질 대신 이미지의 중요성, 자아관의 다양성 등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요소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흔히 자유하면 좋은 것으로들 생각합니다. 자유스럽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나 신념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대상이 너무나 많다면 어떨까요? TV채널이 하나만 있을 때는 재미있건 없건 하루내 한 방송만 시청하면 되지만 채널이 100개가 넘는다면 어떨까요? 여기도 약간 재미있고 저기도 약간 재미있고, 또 어떻게 보면 모두가 그게 그렇고... 차라리 채널이 하나라면 무조건 뉴스보고, 연속극도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냥 보면 되고, 쇼프로그램도 그냥 보면되고... 조금 단조롭긴 하겠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면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옛날에는 TV도 없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은 편이죠.
10여년 전 연세대학교 교수 마광수씨가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을 때와 몇 년 전 서갑숙씨의 <나도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가 나왔을 때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마광수씨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서갑숙씨는 출연하던 TV 프로그램에서 제외된 것 빼고는 별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명인사가 되고 돈도 많이 벌었죠(물론 교수와 연예인이라는 데 차이가 있긴 두 사람 모두 다 공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 얼마 전 마광수 교수는 TIME지에 소개될 정도로 성적 표현의 자유를 개척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그런데 서갑숙씨가 이처럼 의연하게 대처해도 별로 질타를 받지 않는 데는 전자매체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예전에는 일부 선택된 사람들만 신문에 기고를 하거나 방송의 인터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PC통신이라는 것이 생겨서 아무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갑숙씨에 대한 동정(혹은 지지)여론이 확산된 것도 통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낸 결과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서갑숙씨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광수씨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사회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다 많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얼마 전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거짓말>도 결국은 논란 끝에 상영을 허락받았죠. 새디즘, 매조히즘, 동성연애 등 우리사회의 윤리기준으로는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그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전자매체의 힘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TV가 그렇고 PC통신(특히, 인터넷)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TV와 PC통신은 상당히 다릅니다. TV는 같은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에서 정보취득의 불평등를 해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단일방향으로 흐르는 TV는 정보를 전달하기만 했지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건에 대한 반응을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쌍방향통신이 가능한 PC통신이 일반화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 외에 쓰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정보의 혁명입니다.
예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보를 만들어 내고 이를 표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만들고 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전달 속도도 눈부시게 빨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신문이나 라디오, TV 등을 통해 한참 후에야 접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원하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또 원하면 아무 때나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접하게 되는 정보의 양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고 다양해졌습니다. 바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정보를 선택해서 접할 수 있습니다. 채널이 많다 보니 보기 싫은 프로그램은 안보면 되고 인터넷 상에서는 원하는 사이트를 찾아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만 수집할 수 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누구 집 사랑방에 모여 서울 갔다 온 사람으로부터 서울이야기를 듣던 예전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가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정보혁명으로 인해 우리는 보다 자유로와 졌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일까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처럼 많을수록 좋은 것일까요? 여기서 다시 맨 처음에 언급했던 Gergen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지, 즉 정보가 너무 많은 것은 마치 공부할 과목이 너무 많은 것과 비슷합니다. 시험이 내일인데 서로 연관성이 없는 과목들(예를 들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사회학, 회계학)을 한정된 시간에 다 공부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정보를 접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또 접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내용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살이 쪄서 고민인데 전문가들의 조언이 너무 많습니다: 무조건 굶어라, 고기는 먹지말고 야채만 먹어라, 생선은 괜챦다, 아니 생선도 등푸른 생선만 괜챦다, 고기를 안먹으면 몸이 허해지니 적당히 먹어라, 뭐든지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 된다, 등등 끝이 없습니다.
윤리나 가치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충효, 안빈낙도, 어른공경, 형제우애, 시부모 공경, 적선(積善)하면 필히 복받는다(놀부같이 말고 흥부처럼 살자) 등 대부분의 가치관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개인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서양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이 문명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들어오면서 많은 부분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개의 가치관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이러한 근대적 가치관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합리성이니 금욕이니 하는 것들도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그대신 즉흥적, 가시적인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구세대, 기성세대, 젊은 세대, 신세대 등 서로 다른 가치관이 뒤섞여있을 뿐 아니라 같은 세대 내에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제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연 어떤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동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자님 말씀, 예수님 말씀, 부모님 말씀, 선배 말씀, 친구들 말씀, 여기에 각종 전문가 말씀 등 따라야 할 말씀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가치관의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치 TV 채널이 너무 많아서 뭘 보아야 할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이렇게 살아라’는 메시지가 수도 없이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과연 누구 말을 받아들일 것인가 혼동이 되고 자아관이 자주 흔들리게 됩니다. 확고한 줏대가 없어지고 그냥 그냥 매스컴이나 컴퓨터에서 쏟아내는 말들을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인간이 되어 갑니다. 여기서는 이 원칙에 맞춰 살고, 저기서는 저 원칙에 맞춰살고, 또 내일은 다른 원칙에 매어 사는 생활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너무나 많은 정보와 메시지에 우리는 흡수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가치관의 혼동, 자아관의 상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행이라는 빨리 변하고 우리는 또 별 생각없이 그냥 따르게 됩니다. 좋아하는 노래나 가수도 수시로 변합니다. 예전처럼 소위 “18번” 한곡으로 몇십년을 써먹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옛날의 이미자씨 같은 가수는 수십년 간 같은 스타일의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신곡이 나올 때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가수의 인기라는 것이 1-2년을 가기 힘듭니다. 계속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바로 한물갔다는 평을 듣게 됩니다. 수년 전에 젊은 층의 인기를 끌었던 신승훈, 김건모 오빠가 요새는 신승훈 옹, 김건모 옹으로 불릴 정도입니다(그러니 조용필 같은 가수는 두말할 나위가 없죠!). 그 사람들이 아무리 가창력이 있고 또 열심히(그것도 립싱크가 아닌 라이브로) 노래를 해도 왠지 촌스럽고 별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아마 곧 <가요무대>에 나오게 될 지도 모르죠.
이처럼 세월따라 유행따라 살다보면 자신의 가치관과 주체성이 희미해집니다. 바로 Gergen이 말하는 사회에 흡수되어 버리는 ‘무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과연 여러분 자신은 어떤 자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나 자신도 역시 전자매체가 가져다 주는 수많은 메시지의 홍수 속에 흡수되어 뚜렷한 자아관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지나 않은지 돌이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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