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들어가는 글
2. 무아
3. 윤회
4. 나오는 글
1. 들어가는 말
'무아(anattan)와 윤회(samsara)'라는 병렬식 표현{{ 필자는 '무아와 윤회'라는 '와'를 매개로하는 이러한 병렬식 표현이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표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를 사용한 '무아의 윤회'라는 표현이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아와 윤회'라는 표현은 공세적 표현이거나 이러한 공세에 대한 수세적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세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납득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렵고 입증되지도 않는 관념 실체적 자아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윤회가 성립한다는 관념 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함축하고 있다. 즉 생과 생을 거듭하는 윤회는 '불변·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전제해야 하는데, 이러한 실체를 부정하는(무아) 불교가 어떻게 윤회를 주장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입장은 다시 두 입장으로 나뉠 것이다. '무아이지만 윤회가 성립한다'(무아와 윤회의 양립)는 입장과 '무아이니 윤회란 성립할 수 없다'(무아와 윤회의 양립불가)는 입장이 그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무아'와 '윤회'를 다루기보다는 일관되게 '무아'를 설하고 '윤회'를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아이지만 윤회가 성립한다'고 애써 주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무아이니 윤회한다' 혹은 '무아가 윤회한다'의 형태로 '무아'와 '윤회'가 나타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무아'와 '윤회'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며, 더 나아가 '실체적 자아가 있어야만 윤회가 가능·성립한다'는 입장이 오히려 기이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무아와 윤회'의 병렬적 이해에서는 윤회를 인정하기 위해서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결코 입증될 수 없는 관념까지 전제해야 한다.
초기불교에서 '무아'와 '윤회'의 양립을 애써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초지일관 오직 '무아'와 '윤회'를 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반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 자아에 의한 유아윤회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혹은 무아의 윤회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나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고정관념을 버리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제나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은 설명이나 논증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뼈 속 깊이 각인되어 온 일차적/기초적 믿음을 버리는 문제일 것이다.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혹은 이와 같은 존재가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믿음은 여전히 우리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존재의 무상함을 인정하기를 싫어하여 선호되는, 인류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관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인도전통의 실체주의적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너무도 당연하게 의심할 바 없이 받아들여진 전제였으며, 인생의 궁극가치인 해탈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자아는 소멸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해탈(sk. mok a)은 이러한 실체적 자아 있음의 확인이다. 실체적 자아는 어느 경우에도 소멸될 수 없으므로, 해탈 상태에서도 이러한 자아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윤회의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유아윤회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전혀 다른 지점인,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것은 허구이며, 윤회는 이러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며(무아윤회), 열반 또한 실체적 자아 없음에 대한 확인(무아열반)을 포함한다.
실체주의적/우파니샤드적 해탈은 자아(sk. atman)의 절대자(Brahaman)와의 합일(梵我一如)로서, 해탈은 내면의 실체 아트만과 외면의 실체 브라흐만과의 동일성의 인식으로서 '절대아' 아트만 추구의 과정이다.{{ 예컨대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보게 하고, 들을 수 없으나 듣게 하고, 말해질 수 없으나 말하게 하고, 생각될 수 없으나 생각하게 하는 그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
그러나 초기불교의 열반(nibbana)은 이러한 실체적 자아(attan)의 없음의 확인이며, 자아의 영속적인 소멸을 의미한다. 예컨대 아라한(arahant)이 되어 열반상태에 든 수행승 고디카(Godhika)와 바칼리(Vakkali)의 절멸된 의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질책 당한다. 이처럼 실체적 자아의 인정과 불인은 윤회개념에 있어서 차이뿐만 아니라 해탈/열반 개념에 있어서의 차이까지 만들어낸다. 유아해탈이 실체적 자아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듯이, 무아열반은 실체적 자아의 부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유아윤회와 유아해탈, 그리고 무아윤회와 무아열반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실체아의 존재유무는 일상적 경험이나 오감각을 통해 확인·입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유아해탈은 신비적 직관을 통해서, 무아열반은 삼매상태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될 수 있을 뿐이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체험의 문제이다.{{ 실체적 자아의 유무문제는 이와 같은 체험의 문제이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실체적 자아가 있다 혹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무지로부터의 오류'(argument from ignorance) 어떤 주장이 반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참이라고 하거나,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추리하는 오류 를 범하게 될 것이다.}}
실체아의 존재유무는 평상적 수준에서의 경험과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기초적 믿음(a basic belief)과도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회개념에 있어서 사람들간 개념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윤회'가 연속되는 자아간 동일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체아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론적 윤회개념일 뿐이다.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는 반드시 자아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는 자아들간 연속성(continuity)만 전제되어도 가능하다. 동일성에 의한 윤회는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하고,연속성에 의한 윤회는 반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한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반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반영한 자아의 업/행위(kamma){{ 필자는 이 글에서 'kamma'를 문맥에 따라 '업', '행위', '업/행위' 등으로 옮겨 쓴 다. }}에 의한 윤회다.
업/행위가 윤회를 지속시키며, 윤회하는 자아의 연속성은 이 업/행위로 설명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때의 업/행위는 의식(vinnana)과 갈애(tanha)를 전제·수반한다고 생각되는 업이며, 오온의 행(sankhara)과 다르지 않다고 이해되는 업이다.
윤회의 원인으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실체론적 입장에서 말하는 업과 그 의미가 판이하다. 실체적인 업 주체를 부정하는 불교의 업은 단순한 '행위'를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까지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선택, 의지, 결단 등이 강조되는 업이며, 자아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반대로 자아를 규정하는 업이다.
자아는 오직 업일 뿐으로, '무아의 자아'는 '업의 자아'다. 이러한 업이 조건을 갖추어 추동력을 얻는 한 멈추지 못하고 윤회가 계속된다는 것이 '무아의 윤회'의 핵심이다. 달리는 열차가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무아의 윤회'의 자아관은 주지하다시피 상주론과 단멸론의 중도적 자아관으로 설명된다. 동일성을 가진 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적 자아나 현생 이후의 자아에 대한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닌 중도적 입장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자아 '연기'의 자아 를 말할 뿐이다.
즉 자아는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조건이 지속되는 한' 지속·연속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무아를 가르치면서 어떻게 윤회를 말할 수 있느냐', 혹은 '무아를 가르치면서 어떻게 실체적 자아를 부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나 비판은 이러한 중도적 자아관 혹은 연기하는 자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이해 속에서, 필자는 다음에서 초기불교 필자가 이해하는 초기불교 에서 말하는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필자의 출발점은 앞에서 말한 실체주의적 문제의식을 전제하거나 의식해야 하는 '무아와 윤회'의 관점이 아니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고, 후반부에서는 윤회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무아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 후에, 의식의 독특한 속성인 의존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윤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의 12연기,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 그리고 업에 의한 윤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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