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
::::: 목 차 :::::
1. 들어가는 글
2. 무아
3. 윤회
4. 나오는 글
2. 무아
1) 무아의 의미
주지하다시피 석존이 말하는 자아는 고정된 불변의 실체적 자아가 아니다. 매순간 변화하며 조건에 의존하는 자아로서 자아 속에 어떠한 실체적 속성도 없다. 이러한 자아관은 당시의 실체주의적 철학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우파니샤드(Upanisad)의 실체주의 철학에서는 현상적 경험아와는 다른 불멸의 실체아/절대아(sk. atman)를 구별하고 후자를 해탈에서 인식되어야 할 주체로 본다.『문다카(Mundaka) 우파니샤드』에서 현상적 경험아와 불멸의 실체아는 '나무열매를 열심히 먹고 있는 새'와 '자신은 먹지 않고 열심히 먹고 있는 새를 응시하는 새'에 비유된다. 경험아 배후에 참 자아인 실체아가 있으며, 해탈은 '이러한 실체아가 곧 브라흐만'(범아일여)이라는 상태의 체득을 의미한다. 현상적인 경험아의 배후에 현상을 초월한 자기동일적 실재로서의 자아(atman)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윤회 속에서는 불변·불멸의 자기동일적 실재로 간주된다.
석존의 무아설{{ 이 글에서 필자는 '무아'의 의미를 소상히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지 않다(무아의 '윤회'에 초점을 맞추어 '업'개념에 천착하려고 한다). 초기불교 무아의 개념에 대한 연구는 필자의 시도를 포함하여 국내에 많다. 초기불교의 무아의 의미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분석으로는 조성택 교수의「불교의 이론과 실천수행」(『오늘의 동양사상』 8, 2003)을 참고할 수 있다.}}은 현상 배후의 자기동일적 실체로서 자아(attan)를 부정한다. 현재도 죽음 후에도 이러한 자아는 없다.
이러한 자아가 없다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자아를 여섯 감각(기능)(眼耳鼻舌身意)으로 분석했을 때 이들 중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도 하고, 다섯 가지 요소(몸(rupa/色), 감각(vedana ,/受), 생각(sanna /想), 의지/성향(sankhara/行), 의식(vinnana/識)의 오온)로도 분석하여 1)이것들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니며, 2)자아가 이것들을 갖는 것도 아니며, 3)이것들이 자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4)자아가 이것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도 한다.{{ 예컨대 Samyutta-nikaya IV, 1-2쪽.}}
또 이것들 모두는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na)(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다, 고통스러운 것은 무아다)를 속성으로 한다. 더 나아가서 1)여섯 감각, 2)여섯 감각대상(色聲香味觸法), 3)이 양자를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여섯 의식(六識), 4)이 삼자의 접촉(觸), 5)이 삼자의 접촉으로 인해 생기는 세 가지 감각/느낌(受/vedana )(쾌감각, 고감각, 쾌도 고도 아닌 감각) 또한 무상·고·무아를 속성으로 한다.{{ Samyutta-nikaya IV, 24-25쪽.}}
요컨대 오온뿐만 아니라 여섯 감관(감각기능), 여섯 감각대상, 여섯 의식, 이들의 결합, 이들의 결함에서 생기는 세 가지 감각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상하고(anicca), 고통스러우며(dukkha), 변화하는(viparinma) 것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예컨대 Samyutta-nikaya III, 49쪽.}}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특히 중생들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오온)에는 어디에도 실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은 자아는 없다.
그런데 석존이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거부한다고 하여 인간을 오직 물질적 존재로만 보아 죽으면 끝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입장(상주론)도 거부하지만 연속성을 갖는 자아란 없다(단멸론)는 입장도 거부한다. 자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유무중도). 자아는 조건적으로만 있다. 자아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있을 때 그러한 조건들과 함께 자아가 있을 뿐이며, 그러한 조건이 사라질 때 자아도 사라진다.
석존은 중생이 생각하는 자아를 정신적·물질적인 요소들로 해체시키고(오온), 이러한 자아가 대상에 접하여 어떠한 구조로 작용하는가(18요소/18계)를 해부하고 있다. 자아의 기능이나 작용은 있지만 항상적 요소로서의 고정불변의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오온을 모아 놓았을 때 그것이 유기적으로 기능할 때 있는 것이어서 자아는 작용/기능 자체일 뿐이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자아는 업/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 특성 때문에 자아는 윤회한다.
석존의 자아분석에서 윤회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특징은 의식(vi a/識)(오온의 의식 혹은 18계의 육식)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그것이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종교·철학 전통에서 마음이나 의식을 실체화시키고 이에 의거하여 실체적 자아를 주장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석존에 의하면 의식 또한 철저하게 의존 적인 것이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 또한 무상·고·무아를 속성으로 한다.
의식의 이러한 속성은 윤회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식도 의식의 유사개념인 간다바도 윤회과정에서 조건에 의존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독립적 작용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의식은 생과 생이 이어지는 윤회에 있어서 자기동일적 실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석존은 이러한 의식의 의존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좀더 면밀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의식의 속성: 의존성
의식(vi a)도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무상하다.{{ Majjhima-nikaya I, 138쪽. 이 글에 나오는 Majjhima-nikaya의 원문 번역문은 필자의 논문 「업설에 나타난 불교 생명관의 한 특징: 인간과 동물의 평등」(『철학연구』 89, 2004)에서 옮겨 사용하기도 했고, 다른 부분의 번역과 이해에 있어서는 amoli와 Bodhi 스님의 역주본인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 A Translation of the Majjhima-nikaya(Boston: Wisdom Publication, 1995)를 주로 참조하였고, 전재성 선생님의 역주본 『맛지마니까야』1권(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으로부터도 큰 도움을 받았다.}}
의식은 변화하는 무상한 것으로서 다른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유지되고 기능할 수 있다. 또한 의식은 자아의 소재지도 아닌데,{{ Majjhima-nikaya I, 300쪽.}} 이는 의식의 무상성의 당연한 속성이다.
따라서 의식은 독립적으로 출현하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의식은 음식물, 접촉, 의지와 함께 중생을 유지시키는 네 가지 자양분( h ra)을 이루기도 하고,{{ Samyutta-nikaya II, 11-13쪽.}} 여섯 감각기관과 그 대상과 함께 작용하기도 하다가(육식), 명색(nama-rupa)으로서 몸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의식 또한 사라진다. 환언하면, 의식은 조건 발생적이다.
석존은 12연기를 설명하면서(Mah nid na Sutta){{ Digha-nikaya 속함.}} 의식과 명색과의 상호적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의식으로 연하여 명색이 있고(vinnana paccaya nama-rupan) 명색으로 연하여 의식이 있다(namarupa paccaya vinnana)고 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는 의식이 있어야 명색의 생겨남이 가능하고, 명색이 의식의 주처가 되어야 태어남/생(j ti)-늙음-병듦-죽음-고 등으로 이어지는 윤회가 일어난다.
'의식으로 인하여 명색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아난다야, 의식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명색이 생겨날 수 있을까(samucchissath ti)? 석존이시여, 생겨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오려는 의식이 자궁을 이탈해 버린다면, 이 상태에서 명색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abhinibbattissath ti)? 석존이시여, 없습니다......'명색으로 인하여 의식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명색에서 주처(pati h )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태어남, 늙음, 죽음, 그리고 고의 생함과 발생이 미래에 일어날 수 있을까(pa yeth ti)? 석존이시여, 일어날 수 없습니다.{{ D gha-nikaya II, 63쪽.}}
위 인용문은 현생과 미래에 인간의 몸(명색)으로서 태어남을 위해서는 의식과 명색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식은 홀로, 혹은 주도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인간으로 태어남(명색됨)은 의식의 유입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의식 또한 명색에서 주처를 마련함이 없이는 태어나지/윤회하지 못한다.
사티(Sati) 비구에 관한 경{{ Majjhima-nikaya 38경, Mah ta h sankhaya Sutta.}}도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의식의 이러한 의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티 비구는 석존의 가르침을 곡해한 악견을(p paka di igata )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악견을 바꾸지 않자 석존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석존은 그를 불러 이 사실을 확인하고 꾸짖는다.
사티의 악견은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여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ev' ida vi am sandh vati sa sarati, ana anti){{ Majjhima-nikaya I, 256쪽.}}인데, 그는 (현재의/현생의) 동일한 의식이 (조건에 영향 받지 않고 조건과 무관하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석존은 이러한 악견이 불이익과 고통을 가져온다고 사티를 꾸짖고 의식은 조건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섯 감각을 연하여 여섯 대상에 대한 여섯 의식이 발생함을 말한다.
이는 마치 서로 다른 연료에 따라 불이 다르게 명명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즉 불이 장작으로 연하여 타면 장작불이라고 불리고, 쇠똥이나 쓰레기 등으로 연하여 타면 쇠똥불이나 쓰레기불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은 의존적으로 존재·기능한다. 의식이 이처럼 명색(혹은 대상)과의 만남으로부터 발현되고 주도적으로 명색을 찾는 방식으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윤회에 있어도 의식이 불변하면서 자아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 그 무엇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의식의 이러한 속성과 의미는 의식의 유사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간다바'(gandhabba)에서도 나타난다.
초기경전에서 윤회와 관련된 말로서 간다바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간다바가 태아를 생기게 하는 한 조건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부모의 성행위, 어머니의 가임기와 함께 간다바가 결합되어야 태아가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에 만일 부모의 성행위가 있고 어머니가 가임기 일 때, 간다바(의) 옴이 있다(gandhabho ca paccupa thito hoti). 이 세 가지의 결합(sannip ta)으로부터 태아의 들어옴이 있다"라고{{ Majjhima-nikaya I, 266쪽.}} 말한다.
부모의 성교와 어머니의 가임기에 간다바가 있을 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태아가 생긴다는 것이다. 앞에서 '의식이 자궁에서 명색을 만남으로써 (다른) 생이 나타난다'는 말에 유비되는 말이다. 간다바와 식이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지만, 태아는 명색이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간다바를 의식이라는 말로 대체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간다바는 잉태상황에서 명명된 의식의 다른 이름으로서 '출생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의식의 유사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간다바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기능하지 않고 조건과 함께 출현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성교와 어머니의 가임기라는 조건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간다바의 개념으로부터 '사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 중간 존재로 인식되는' 중유(中有/中陰, antar -bhava) 개념이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간다바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간다바의 개념의 비약이라고 생각되는 '바르도'(bardo)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에서 재탄생/환생에 이르는 기간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 환생에 이르는 의식의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는 바르도의 개념은 사실 초기불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의식, 그리고 그 유사의식인 간다바의 이러한 조건적 출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러한 개념이 윤회를 주도하는 주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중심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죽음 후 우리는 어떻게 되며 의식은 어떠한 과정을 거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물음은 석존에 의해 금지된 물음이다.
그렇다면, 석존은 왜 그러한 물음을 금지시키고 있을까? 답변이 이미 자신의 가르침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식의 의존성에 함축되어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윤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12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포괄적으로는 업에 의한 윤회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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