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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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2. 무아
3. 윤회
4. 나오는 글
3. 윤회
무아의 자아가 윤회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2연기, 오취온, 12입처, 18계, 탐진치, 갈애, 집착, 업 등을 통해 윤회의 발생구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무아의 실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아는 무명으로 시작하는 12연기라는 심적·실제적 존재 구조를 가지며, 오온을 자아로 집착한다. 중생은 12연기라는 심적 구조 속에서 오온무아를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윤회하는 것이다. 업으로 말하자면, 12연기라는 업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가지며 오취온이라는 자아구성의 틀을 가짐으로써 윤회를 계속 한다.
다음에서는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 12연기, 그리고 오온을 자아로 집착하는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를 살펴본 후, 업에 의한 윤회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 12연기
주지하다시피 12연기는 석존의 깨달음의 핵심내용이다. 그는 12연기를 통해 '윤회/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았으며(12연기의 순관), 또한 윤회/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보게 되었다(12연기의 역관)고 한다.
12연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념 하나하나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물론 12연기 전체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후대에 12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12연기에 대한 정통적 해석은 붓다고샤(Buddhaghosa) 스님의 것으로 12지(a ga)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친 윤회과정과 두 번의 인과관계(三世兩重因果)로 보는 것이다.
삼세양중인과설의 특징은 주지하다시피 12개의 지를 논리적·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는 또한 12연기를 12개의 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의 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2연기는 삼세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윤회하고 있는 존재의 마음의 구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2연기가 윤회하는 마음의/심적 구조라는 관점에서, 12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들어 윤회를 말할 때는, 그 어느 하나는 그것에 선행하는 모든 지를 전제한다. 예컨대 식은 무명과 행을 전제한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로 인하여 우리는 실질적으로 현재 윤회적인 삶을 이어감은 물론, 이 생 이후에도 생을 거듭하는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12지는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이 각각이 독특한 역할을 하는 윤회의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업의 축척으로서 행(sa kh ra), 또 다른 명색/몸 탄생의 조건으로서의 의식(vi a), 쾌 느낌/감각과 이를 가져오는 것들에 대한 갈애(ta h ), 이 갈애를 추동력으로 하는 취착으로서의 취(집착/up d na)의 역할이 특히 주목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의 동력으로써 행(혹은 업), 태어남/생에 있어서 필수적인 의식, 욕탐(chandar ga)으로서의 갈애, 반해탈/속박의 직접원인으로서의 취/집착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연기가 의미하는 바는 이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지멸시켜도 윤회의 끊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 지들 간 연쇄성 때문이다.
이와 같은 12연기는 윤회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탈윤회적인 인간의 실상에 대한 설명이다. 12연기는 윤회가 과거 우리의 선택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윤회의 삶을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우리가 어떻게 윤회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윤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윤회도 윤회의 벗어남도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라는 메시지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당장 우리의 마음과 삶을 12연기라는 심적 구조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윤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혹은 윤회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연기에 비추어 현재 자신의 윤회여부를 알 수 있다면, '사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무아'라는 나의 존재 속성을 모르는 체 무명(avijj /無明)에서 신구의의 행위(행/업)를 하고, 이러한 행/업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식활동(식)을 지속하고, 이런 방식으로 12연기의 심적 구조에 따라 평생을 살고 죽기 직전까지 이러한 마음의 패턴을 유지시킨다면, 윤회는 분명하고 따라서 사후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석존은 의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성과 12연기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생사/윤회의 일어남과 그침을 설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들은 존재했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았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어떻게 존재했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했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미래에 우리들은 존재할 것인가? 미래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 미래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하였다가 무엇이 될 것인가?......나는 존재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이 중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Majjhima-nikaya I, 265쪽.}}
석존은 '과거에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였으며, 미래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될 것이며, 현재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식의 물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류의 물음은 잘못된 자아관을 갖게 하기 때문에 금지 시킨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종류의 물음이 잘못된 여섯 가지 자아관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다(Majjhima-nikaya I, 8쪽).}} 다른 한편 우리의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삶에 대해서 석존 자신이 분명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이러한 물음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의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성이나 12연기설 등을 통해서, 보다 포괄적으로는 업(의 자아)에 의한 윤회를 통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2)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
오온으로서의 자아(혹은 18계속에서의 자아)가 갖는 무상·고·무아의 속성을 모르는 윤회의 자아는 오온에 집착하는 오취온(pa cup d nakkhandh /五取蘊)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오취온의 자아로서 윤회하게 된다. 석존은 오온에 집착할 때 존재가 미래에도 생/태어남을 거듭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석존은 우리가 (오온에 대한 집착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물과 같은 외부 대상들에 대해 집착할 때도 윤회를 거듭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은 본질적으로 오취온의 변형형태이거나 오취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오취온의 존재방식은 '나 만들기'(aha k ra)와 '나의 것 만들기'(mama k ra) 형태로 나타나며, 외적 대상에 대한 집착도 '나 만들기'나 '나의 것 만들기'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온(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윤회는 오온에 집착하는 바로 이러한 오취온적 자아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석존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 윤회를 생겨나게 하며,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윤회를 지속시킨다고 말한다.
석존은 오온에 끌리지 않는 무집착의 삶에 의해 윤회를 끊게 된다고 한다. 그는 '마음이 색·수·상·행·식 오온에 끌리지 않아(virajjati) 집착에 의한 번뇌로부터 해탈되고, 해탈되어 닛바나에 이르고 윤회를 끊게 된다'{{ Samyutta-nikaya III, 44-45쪽.}}고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한 집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bhava/有)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등의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Majjhima-nikaya I, 511쪽.}}
그런데 오취온적 자아의 태도는 외부대상을 향해 확대된다. 외부대상에 대해서도 '나에게 있는 것(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Majjhima-nikaya II, 264쪽.}}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내 것이라는 것은 없는데,{{ A guttara-nikaya. II, 177쪽. 주지하다시피, 팔리어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다. 그래서 '있다/이다' 의미의 'atthi'(to be, to exist)로 소유를 표현한다. }} 오취온적 자아는 사람과 사물 등을 '나의 것'으로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 배타적·집착적 소유태도로서 외부대상과 관계 맺는 것이다.
석존은 고귀한 구함과 고귀하지 못한 두 가지 구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외부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오취온적 삶을 예시한다. 고귀하지 못한 구함은 우리를 윤회하게 하는 외부대상 사람, 가축, 금은과 같은 재산 등의 집착물(upadhayo) 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에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이러한 것을 구하기 때문에 윤회가 계속된다고 한다.
여기에 어떤 이가 자신이 태어남의 조건/상태로 있으면서(attan j tidhammo) 또한 똑같이 태어남의 조건을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비구들이여, 태어남의 조건이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내와 자식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는 것이며, 남녀 노예, 염소와 양, 닭과 돼지, 코끼리, 소, 숫말과 암말, 금과 은이 생겨남의 조건에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집착물(upadhayo)들이 태어남의 조건이다. 이러한 것들에 속박되어 있고, 정신을 잃고, 탐착하고, 스스로 생겨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생겨남의 조건을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Majjhima-nikaya I, 161-162쪽.}}
중생은 윤회의 조건 속에 있으면서, 윤회의 조건을 구하기 때문에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윤회를 피하는 것은 이러한 윤회의 조건을 직시하고 윤회를 일으키는 것들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윤회 조건의 위험을 알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 고귀한 구함이다. 석존은 고귀한 귀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가 자신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똑같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는 위험을 알고 태어나지 않는, 최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열반/닛바나(aj ta anuttara yogakkhema nibb na )를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Majjhima-nikaya I, 162-163쪽.}}
석존 또한 자신의 출가 이전과 이후의 삶을 두 종류의 구함으로 설명한다.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자신도 스스로 태어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똑같이 태어남(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을 구했다고 한다(고귀하지 못한 구함).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왜 나는 스스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그러한 조건을 구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태어남의 조건이 갖는 위험을 알고 닛바나를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고귀한 귀함).{{ Majjhima-nikaya I, 163쪽.}}
이처럼 무아의 실상을 모르는 체 우리는 오취온적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윤회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3) 업/행위에 의한 윤회
(1) 자아는 업/행위이다; 초기불교의 자아에 대한 서술의 특징은 '무아'(an-attan)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니다/없다'(an/a)라는 방식의 부정형 표현이다. 그 의미를 긍정형으로 표현한다면, '자아는 업/행위(kamma)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 불변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행위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무엇'의 의미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어떻게'의 의미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개념이 요청하는 것은 있지도 않는 '무엇'의 자아를 쫓지 말고, '어떻게'의 자아를 쫓으라는 것이다. 일순간의 업/행위를 생각하며 행동하고, 이것이 축적되어 이루는 평생의 업/행위를 생각하며 행동함으로써 행위에 의해 자아를 규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의 자아'를 '행위의 자아'라고 했을 때의 '행위'는 일회적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축척·고착되어 이루어진 행위패턴까지를 의미한다. 행위패턴을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습관, 성격/성향, 성품을 의미한다. 또한 석존이 말하는 행위/업은 신구의 행위(k ya kamma)(身), 말(vac kamma)(口), 그리고 마음/생각(mono kamma)(意)을 포괄하므로, 업은 신구의를 통한 단일 행동뿐만 아니라 신구의에 있어서의 습관, 성격/성향,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업은 오온에서 말하는 행(sa kh ra/行)과 다르지 않다.{{ '업'과 오온의 '행'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우선 'kamma(업)'와 'sa kh ra'(행)의 어원은 모두 'k '(행위하다)로 같다. 후자의 경우 접두사 'sa '(함께)이 붙은 점이 다를 뿐이다(업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성향/성품'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을까?). 팔리어 사전을 보면, 'sa kh ra'는 '윤회를 일으키는 의도나 마음상태'(S. II, 82의 사용례를 들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되어 있는데(Davids, Rhys, Pali-English Dictionary(PTS. 1979), 664쪽), 이는 '업' 개념에서 의도가 강조되고 있으며 업이 윤회를 일으킨다는 점과 흡사하다. 또한 초기경전에서는 신구의 업을 말할 때 '업'이라는 말 대신 '행'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Majjhima-nikaya I, 389쪽). }}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업의 특징은 '의도'(cet na)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업에 대한 정의로서 빈번히 인용되고 있는 "나는 ...... 의도를 업이라고 부른다(cetan ha ......kamma vad mi)"{{ A guttara-nikaya III, 415쪽.}}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시피. 행위에 있어서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말은 과장되게 이해되어 왔지만, 필자는 이 말을 '의도 자체도 행위이며, 신구의를 통해 표출되는 모든 행위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붓다고사 스님의 이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과장되거나 곡해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의도가 결여된 업은 업이 아니다'라거나 '의도 없이 무심코(혹은 무의식적으로) 한 행위는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아니다'라는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해가 원문의 맥락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비논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소상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한다. }} 의도 자체가 행위 일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업에 있어서 어떤 의도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행위의 자아'에게 어떠한 행위가 요청되는가? 당연히 선한 행위, 즉 선업이다. 선업(kusala kamma)과 악업(akusal kamma)이 나타나는 방식은 오계, 사섭법, 사무량심, 팔정도, 자비 등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덕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신구의의 청정한 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보다 소상히는 10가지 선행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신구의의 더러움(asoceyya)을 정화시키는 10가지 선행으로서 신구의 각각에 대하여 3, 4, 3가지 행동을 말한다. 그 내용은 1)생명체를 상해하지 않는 것, 2)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것, 3)올바르지 않는 성적 욕구를 갖거나 근친상간이나 법을 어기는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4)모르는 것을 안다고(혹은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거나, 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혹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하거나, 자신이나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 5)화합을 깨고 싸움을 일으키는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6)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 폭언, 화를 촉발시키는 말 등과 같은 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 7)무의미한 말, 때에 맞지 않지 말, 사실과 합치하지 않는 말, 무익한 말, 법과 율에 맞지 않는 말, 무가치한 말, 사리에 맞지 않는 말, 들을 가치가 없는 말, 이로움과 무관한 말 등을 하지 않는 것, 8)질투하지 않는 것, 9)악의/적의를 품지 않는 것, 10)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다.{{ A guttara-nikaya V, 264-265쪽.}}
반대로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10가지 악행이 된다.{{ 나타나 있다시피, 10가지 악행은 오계 중에서 불음주계를 제외한 다른 네 가지 계의 확장으로서 그 전체가 신구의 선행/청정으로 압축된다. 10가지 선행에서 주목되는 것은 열 번째의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인데, 이는 올바른 견해(정견)를 갖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팔정도에서도 명시되고 있다시피, 정견은 불교윤리의 출발점이면서 토대다. 올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이로부터 올바른 말과 올바른 행위가 비롯되기 때문이며, 그릇된 견해는 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A guttara-nikaya V, 211-212쪽). }}
그런데 업의 자아가 선업/선행을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여 탐욕(r ga), 싫어함/미워함/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탐진치의 지멸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을 하느냐 혹은 악행을 하느냐는 탐진치의 유무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선한 행위, 선한 말, 선한 생활을 '선한 습관'(kusalas la)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탐진치를 여읜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Majjhima-nikaya I, 27쪽.}}
반대로 악한 행위, 악한 말, 악한 생활에 대해서는 '악한 습관'(akusalas la)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Majjhima-nikaya I, 26쪽.}} 요컨대 선행은 무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악행은 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선행과 악행의 뿌리(m la)가 무탐진치의 마음과 탐진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업/행위로서의 자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상태는 탐진치 지멸의 마음이다. 궁국의 선은 탐진치 지멸의 마음 상태이며, 이러한 선의 상태는 선인/아라한의 최종 도달점이다. 이러한 지점에서는 더 이상 추구되는 선업/선행은 없게 된다. 이 상태는 업의 소멸상태로서 도덕적 인과로 말하자면,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행위에 대하여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결과'의 인과법이 적용된다.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완수해야 할 일이 없고, 행위로서 쌓아놓은 업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윤회를 추동시킬 수 있는 업이 지멸된 것이다.
(2) 업/행위의 자아의 윤회: 도덕적 인과에 따른 윤회
업/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업에 의해 과보를 받으며 윤회한다. 업의 선악에 따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규정받고 규정해 가는 존재다. 선한 행위는 자아를 좋은 존재상태 속에 규정하고, 악한 행위는 나쁜 존재상태에 규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행위의 자아는 '선업선과/악업악과'라는 도덕 인과법 혹은 업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석존은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네 가지 경우로 설명한다. 즉 1)악행악과, 2)선행선과, 3)악하면도 선한 행위에 대한 악하면서도 선한 결과, 그리고 4)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행위에 대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결과 행위의 소멸로 이끄는 인과 경우로 설명한다.{{ Majjhima-nikaya I, 389쪽.}}
1)과 2)는 업 법칙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며, 3)은 선악 양면적 속성을 가진 행위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인과를 설명하는 것으로 업 법칙에 어긋나지 않으며, 4)는 업을 소멸시 켜 업의 속박을 더 이상 받게 되지 않아 열반에 이른 아라한의 상태를 의미한다.
'선인선과/악인악과'라는 업 법칙은 또한 모든 행위는 보상(reward)이나 처벌(punishment)로서의 결과/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을 전제한다. 결과/과보를 의미하는 'phala'와 'vip ka'라는 말은 모두 '익다'를 의미하는 동사로부터{{ 'phala'와 'vip ka'는 각각 동사 '익다'(ripe)를 의미하는 'phalati'와 'vi vac'로부터 파생. }} 파생된 말로서 특정행위가 결과를 맺을 때까지의 시간을 함축한다.
특정행위의 결과는 1)이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2)다음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으며, 3)그 이후의 어느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A guttara-nikaya III. 414쪽.}}
행위가 결과를 맺기까지의 시간은 '행위 직후'에서부터 '기약할 수 없는 긴 기간'에까지 걸쳐있다. 또한 동일한 행동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그 과보가 다를 수 있다. 경전에서는 한 줌의 소금을 컵에 넣는 경우와 갠지스 강물에 넣는 경우에 비교한다.{{ A guttara-nikaya I, 249-253쪽.}}
한 줌의 소금을 컵에 넣을 때 물은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강물에 넣는 경우 물은 여전히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행동도 어떠한 사람이 했느냐에 따라 과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석존은 이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예컨대 돈을 훔친 '동일 행위'의 경우도 행위자가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 다음 생에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이 생에서 그 행위가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으며, 넓은 한량없는 마음의 사람'{{ A guttara-nikaya I, 249쪽.}}이냐 아니냐에 따라 동일 행위에 대한 과보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행위와 과보 간에는 앞에서 말한 기간변수와 사람변수 이외에도 상황변수나 행위의 복합관계성 변수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한가지 행위도 어떠한 상황에서의 행위냐, 혹은 어떤 사태·행위와 (보다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얽혀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다양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업 법칙이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도 업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일 수 없다. 언급된 다양한 변수들은 업 법칙의 예외규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업 법칙의 비예외성을 설명해 주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특정 행위가 업 법칙에 어긋나 보인다면, 그것은 인과기간의 무확정성이나 행위의 복합관계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과보는 일차적으로 존재의 범주를 결정한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에 의하면 욕계(k madh tu), 색계(rupadh tu), 무색계(arupadh tu)의 삼계가 있고, 이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욕계의 다섯 행로(pa ca gati)들 중 하나인 인간계이다. 인간은 자신의 업/행위에 따라 다섯 개의 상이한 존재조건들 지옥(nir yo), 축생계(tiracch nayoni), 아귀계(pittivisayo), 인간(manuss )계, 신(dev )계 중에서 한 곳에 태어난 것이다.
어떤 범주의 중생이 되느냐는 자신이 '어떻게 행위 해 왔느냐'(혹은 '어떻게 살아 왔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경전은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한 마디로 '개같이 살면 개가 되고 소같이 살면 소가 된다'고 한다. 한 숫타(Kukkuravatika Sutta)에서는 푼냐(Pu a)와 세니야(Seniya)라는 고행자가 나오는데, 이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벌거벗고 소와 개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수행자들이다. 석존은 소와 개를 흉내 내는 이들의 고행이 이들을 해탈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축생계나 지옥계로 빠지게 한다고 말한다.
푼냐여, 여기 어떤 이가 개의 행실(kukkuravat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덕목(kukkuras l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마음(kukkuracitt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행동(kukkur kapp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는다. 그가 개의 행실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덕목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마음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행동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으면, 몸이 부서져 죽은 후에 개의 동료(sahabyata)로 태어난다(upapajjati). 그가 만일‘나는 이러한 덕목, 행실, 고행, 범행에 의해서 신이나 다른 신이 될 것이다'와 같은 견해를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두 가지 행로, 즉 지옥이나 축생계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푼냐여, 그의 개의 행실이 성공한다면 그는 개의 동료로 태어난다. 그것이 실패하면 그는 지옥에 태어난다.{{ Majjhima-nikaya I, 387-388쪽.}}
윤회의 영역인 다섯 영역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란 다른 어떤 영역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가 크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영역보다도 인간계가 더 유의미하다. 열반으로 직결되는 영역은 오직 인간계뿐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판자, 그것도 구멍이 뚫린 판자를 만나 자신의 목을 그 구멍 속에 넣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비유한다.
그런데 같은 인간계에서도 존재조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또한 자아의 업/행위에 따른 상이한 과보 때문이다. 같은 인간계의 인간도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존재조건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석존은 인간 사이의 우열, 수명의 장단, 건강, 미추, 권력, 빈부, 출생차, 지능차 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하고{{ Majjhima-nikaya III, 202-203쪽.}}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중생은 행위의 소유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로부터 태어난 자이며(행위의 모태이며), 행위를 친척으로 하며, 행위를 의지처로 한다. 중생을 열등하게도 하고 탁월하게도 하는 구별/차이(vibhajati)를 생기게 하는 것은 업이다.{{ Majjhima-nikaya III, 203쪽.}}
이 말은 인간 사이의 존재조건의 차이가 자신 스스로의 행위/업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말 자체는 과거행위에 의한 현재결정론으로도 읽혀질 수 있고 현재행위에 의한 현재·미래결정론으로도 읽혀질 수 있겠지만, 석존의 진정한 의도는 후자의 읽는 방식에 따라 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행위의 자아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존재범주와 존재조건을 규정받고 규정하면서 윤회한다. 자아의 행위에 의한 이러한 의미의 도덕적 인과법에 따른 윤회는 12연기라는 마음의 구조에 의한 윤회나 오취온적 자아에 의한 윤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숙명론이나 운명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존재조건의 차이가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상과 같은 도덕적 인과법으로서 석존의 업설이 양면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업설은 현실의 불평등을 고착·정당화시킬 수도 있고, 보다 나은 존재조건을 위한 각자의 노력을 촉구하는 교설일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업설은 실제로 현실에서는 양날의 칼로 기능하는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업설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체념을 가르치고, 그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으라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업에 의해서 브라만이 된다'는 석존의 유명한 말은 불평등 계급사회에 대한 평등사회 촉구의 메시지로도 읽혀질 수도 있고, 출생이나 사회적 신분이라는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됨'(도덕성/행위)이라는 기준에 따른 새로운 평등사회 구현의 메시지 로도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을 위한 분투를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항상' 변혁의 능력이 내재해 있다는 절대적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의 발현을 통한 진정한 인간평등과 인간존엄에 대한 요청이 업설의 깊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행위/업에 의한 윤회의 자아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능력의 인지와 그러한 능력의 온전한 발현이다.
지금까지 행위/업의 자아가 그 행위의 선악에 따른 과보를 받으며 존재조건을 결정하게 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윤회는 업/행위가 자아의 현재 존재조건을 규정하면서 자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행위, 습관, 성격/성향, 성품으로서의 업이 자아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행위, 습관, 성격/성향, 성품으로서의 업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업의 작용에 따라 매순간 무상하게 모습을 바꾸어 가는 업의 자아가 있을 뿐이다. 사실상 (고정의) 자아는 없고 업/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도 이 맥락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윤회하는 자아의 업은 끊임없이 쌓여가면서 스스로를 증식시켜 간다. 그리고 업이 작용하는 현재의 무상한 자아/육신이 다할 때, 의식과 갈애를 만나 다른 생/태어남을 이루는 방식으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행하며 윤회한다.
윤회의 최초 시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윤회과정 속에서 한 생이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기제는 업으로 설명할 때 이러하다. 즉 한 생이 다 한 후, 업은 의식과 갈애를 만나 다른 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업, 의식, 갈애가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생이 계속되는 '다시 태어남'이 있다고 한다. 이 세 가지의 만남은 밭에 씨를 뿌리고 수분/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것에 비유된다. 업은 밭에 비유되고, 의식은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며, 갈애는 밭에서 씨가 나게 하는 수분에 비유된다.
'존재(bhava), 존재'라고 말합니다. 석존이시여, 얼마나 멀리까지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까? 아난다야, 욕계(k madh tu)와 익을 업이 없어져 버린다면, 감각적 존재(k mabhava)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난다야, 업은 밭(khetta)이고 식은 씨앗(b ja)이며 갈애는 수분(sineha)이다. 무지에 덮여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열등한 세계의 중생들에 대해서는 열등한 세계(h na dhatu)에 의식이 자리한다(색계와 무색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그러나 의식이 자리한 세계는 열등한 세계 대신에 각각 중간 세계와 수승한 세계임). 그러므로 미래에 존재의 다시 태어남(punabbhav bhinibbatti)이 있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A guttara-nikaya I, 223쪽.}}
이상의 비유는 업, 의식, 갈애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윤회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세 가지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게 다음의 생/태어남에 기여한다.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다른 둘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밭/업이 없으면 씨/의식은 무의미하고, 밭/업에서 씨/의식을 살아나게 하는 수분/갈애가 없으면 다시 태어남의 윤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이 셋의 결합은 현재 이순간의 삶의 윤회 속에서도 전제되지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거듭날 때도 전제된다. 따라서 우리가 '업/행위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말할 때, 이 때의 '업'이라는 말 속에는 의식과 갈애가 수반되어 있다.
생/태어남의 연속으로서 윤회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1)업, 의식, 갈애의 삼자 결합은 앞에서 살펴본 2)의식과 명색의 만남과 3)부모의 성행위, 어머니의 가임기, (유사의식으로서) 간다바의 삼자결합에 의한 생의 연속과 연관지어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설명방식은 설명의 측면이 다를 뿐이다. 12연기의 마음구조에 의한 윤회와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에 대한 설명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들 다섯 가지 설명방식에는 공통적으로 의식의 작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통된 윤회의 의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업(혹은 업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행)과 갈애(혹은 집착)를 전제·수반{{ '함께 일어나거나 나타남'(『동아 새국어사전』(두산동아편집국 간행, 2003))이라는 의미에서의 수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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