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상과 사물 자체의 구분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확실한 제 1원리로 확립하고 나 서 데카르트는 그 원리로부터 확실한 인식의 기준을 구한다. 즉 그 원리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에 확실한 인식일 수 있는가를 찾아내어, 그 기준을 여타의 다른 인식에 대해서도 그 확실성의 판단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제 1원리가 포함한 조건은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졌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다 참이다. 13) 예를 들어 하나의 집을 바라봄으로써 의식에 그 집의 표상이 명석 판명하 게 그려지면, 그 때 그 의식체험자에게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식에 집의 표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나의 의식에 주 어지는 명석판명한 관념 안에 머무르는 한, 그 판단은 항상 참이다. 그러나 의식 안에 주어진 명석판명한 관념으로부터 자신의 의식 밖에 집이 실제로 존재한다 는 사실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명석판명성의 기준에 따라 볼 때 우 리 의식에 확실한 앎은 언제나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의식내재적 실재성일 뿐이 기 때문이다. 명석판명하게 주어져서 확실하게 인식된 것은 의식내재적 표상일 뿐이다. 그것 너머 의식 외적 사물 자체는 우리 의식에 확실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의식 외적인 사물 자체와 그것에 관한 의식 내적 표상을 구분한다.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지는 확실한 앎의 영역은 주 관적인 의식 내적 관념의 영역일 뿐이고, 의식 외적 객관 세계 자체에 대해 우 리는 직접적인 확실한 앎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적인 관념에 상 응하는 외부세계가 과연 실재하는가? 외부세계가 우리의 관념이 그리는 그 방식 그대로 실재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심각하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식 내면과 외면, 주관과 객관, 표상과 실재의 이원적 구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바로 근세 사유의 특징인 '세계의 이중화'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다. 즉 근세의 합리론자나 경험론자나 모두 객관적 세계 자체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세계라는 식의 이중적 세계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주객의 이 원적 구도, 의식 내적 표상과 그 너머의 실재 자체의 구분이 바로 칸트에서 현 상과 물자체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그 후 그러한 칸트적 물자체를 비판하는 독 일관념론자들의 논의는 결국 이러한 이원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구도, 주객도식, 현상과 물자체, 의식에 대한 존재와 즉 자적 존재 자체의 구분은 우리의 일상적 사유논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적 사유가 바로 그런 이원화를 낳는 실체화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 제 그런 실체화의 논리가 어떤 것인가를 밝혀보기로 하자.
2. 자아의 실체화와 이원론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사고활동 자체로서의 자 아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한 명제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명제가 의미 하는 바를 자아의 존재의 확실성만으로 해석하면서, 그 다음의 문제로서 그렇다 면 그와 같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그 자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 다.14) 이와 같이 자아의 존재의 확인과 그 본질의 물음을 구분함으로써 데카르트 는 특별한 논의 없이 전통적으로 행해져온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15) 즉 어떤 것이 있는가 라는 존재의 문제와 그 있는 것이 무엇으로서 있 는가 하는 본질의 문제를 구분하면서, 그 구분을 자아에 있어서까지 그대로 적 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 무엇으로서 있는가, 즉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확인 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그렇게 있는 것은 실체로서 있는 것이 되며, 그 렇게 있는 것이 무엇으로서 있는가 하는 그 무엇은 그 실체가 지니는 속성의 자 리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곧 실체와 속성의 구 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자아의 존재를 확인한 후 제기된 자아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해 데카 르트는 그것은 곧 사유라고 대답한다. 자아의 본질은 그 자아의 존재가 확실한 만큼 확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유 이외의 다른 것 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질은 사유이며, 그 사유를 본질로 삼는 자아는 그러므로 사유적 실체이다. 이와 같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로서의 자아와 그 자아의 본질을 구분하는 실체화의 논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주객이원 화의 논리를 밝혀보자.
"사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로서 데카르트가 직관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 신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고의 활동성이라는 점이다. 의식 활동 자체가 활동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것을 보고있음을 의식할 때, 내게 직접적으로 확실한 것은 그것을 보는 활동성 자체 이다. 그 활동성 안에서는 아직 어떠한 분리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봄의 활동 자체가 확실한 것이지, 보고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거나 보는 나의 눈(신체)이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보여진 것이 보는 활동과 무관하게 따로 객체로서 존재한 다거나 하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무분별의 확실성 안에 머물러 있지를 못한다. 사유 내지 의식 활동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언어 논리가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논리는 그 활동이 누구의 활동인가 하는 활동 주체를 묻는다. 그저 활동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이 해되며, 활동에 대해 활동하는 것, 활동주체가 그 활동의 기반인 실체로서 전제 되고 그리하여 그 활동이 그 실체의 속성으로 설명되어야만 납득하는 것이다. 그저 빨간색이라는 것은 불완전하며 꽃이 빨갛다거나 종이가 빨갛다거나 해야 비로소 납득이 가듯이, 그저 봄이라는 것도 불완전하게 여겨지며, 내가 본다거나 네가 본다거나 해야 비로소 납득이 간다. 눈 앞의 빨간색에 대해서는 '이 꽃이 빨갛다'고 말해야 하며, 나에게 떠오르는 사유에 대해서는 '내가 사유한다'라고 말해야 된다. 이것이 곧 '주어-술어' 관계의 우리의 언어구조에 상응하는 '실 체-속성'의 관계이다. 속성이 변화하고 달라질 때 그 속성의 담지자인 실체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그 변화의 기저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체화의 논리는 어떤 분리를 가져오는가?
봄의 활동 자체에서는 보는 자와 보아진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봄의 활동은 그 둘을 포괄하는 미분의 전체가 된다. 그런데 실체화의 논리는 활 동에 앞선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즉 활동성을 하나의 활동적인 것의 활동으로 해석함으로써, 활동 자체를 본래 그것이 지닌 주객포괄적 전체성을 벗어나게하 여 그 한쪽 끝인 보는 자(주관)만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보아 진 것까지도 봄이라는 주관적인 우연적 활동 결과로 간주됨으로써 직접적으로 보아진 것은 그런 주관적 활동결과인 주관적 표상일뿐, 그와 독립적인 객관 자 체는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객관 자체는 주관적 활동과 무관하게 존립하는 실체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주객포괄의 동일적 전체성은 깨어지고 오히려 보는 주관의 일차적인 대상은 관념적인 주관적 표상일 뿐이고 객관 자체는 주관과 분리된 고정된 실체가 된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의심의 방법을 통해 의식활동성으로서의 자아의 본질을 직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을 실체화함으로써 다시금 정신과 물질, 사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의 이원론에 빠져들고 만다.
3. 이원론과 유아론적 관념론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이 각기 사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 주관과 객관이라 는 별개의 독립적 실체로서 간주됨으로써 근세 이후 서양철학의 독특한 이원론 과 다시 그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가능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사 유적 실체는 초월철학에로 나아가는 주관주의 철학의 발판이 되며, 반대로 그의 연장적 실체는 근세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일치되는 객관주의 철학의 발판이 된 다. 주객분리에서 시작하는 이원론이 해결해야 할 철학적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유하는 자아 만큼 확실한 것인 사유된 것이 객관적인 연장적 사물세 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매개성도 찾아지지 않는 것이라면, 즉 정신과 물질이 각각의 실체로서 각자의 원리에 따르는 서로 무관 한 것이라면, 어떻게 구체적 인간에 있어서 그 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신체로서 상호관계하며 화합할 수 있는 것인가?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가 서로 별개의 것이고 그 둘 사이에 어떠한 공통성도 없다면 인간의 사유가 어떻 게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존재하는 물질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것 인가? 사유적 실체의 사유 안에서 표상된 것이 연장적 실체 자체와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에게 있어 사유하는 자아와 사유활동 만큼 그 사유대상이 확실하다 고 해도, 그렇게 확실한 사유 대상이 객관 세계에 속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사유된 표상에 그치기 때문에, 확실성의 영역은 의식 내재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며, 의식 외적 실재성은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데카르 트에게 있어 확실성의 자아는 외적 세계와 분리된 의식 내면에 밀폐된 자아, 유 아론적 자아인 것이다. 이처럼 실체화의 논리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데카르트적 의식분석을 통해서는 의식 초월적 외부세계의 실재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 므로 이 유아론적 자아를 벗어나 외적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데카르트에게서는 자아 너머의 또 다른 실재, 즉 신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즉 사유하는 자아와 객관 세계와의 직접적 연관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그 둘을 매개하는 제 3자가 요구되며, 그것이 바로 신이 된다. 객관세계의 실재성은 그 신의 성실성에 근거해서 만 확보되는 것이다. 16)
'인문학, Humanit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카르트의 이원론(서양)과 심성론(동양) (0) | 2016.11.07 |
---|---|
인간의 마음 (0) | 2016.11.07 |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 (0) | 2016.11.07 |
데카르트의 자아관 - 주관적 관념 너머의 객관적 실체: 신과 사물세계 (0) | 2016.11.07 |
데카르트의 자아관 - 자아의 발견과 그 의미 (0) | 2016.11.07 |
데카르트의 자아관 - 의식활동성으로서의 자아의 발견 (0) | 2016.11.07 |
데카르트의 자아관(Descartes's Theory of The Self) (0) | 2016.11.07 |
기억 [記憶, memory] (0) | 2016.1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