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념과 관념의 원인
데카르트가 신에 나아가는 길은 물론 의식분석을 통해서이다.17) 의식내재적 실재성의 분석을 통해 그 유한성 너머의 무한자로서 신을 주장하게 된다. 그런 의식분석의 단초는 우리 의식 안에 주어진 관념의 실재성이다. 여러 상이한 관 념들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즉 그것이 사유양태로서의 표상이라는 것에 있어서 는 다 동일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즉 그 사유된 것이라는 내용적 측 면에 있어서는 다 상이하다. 예를 들어 빨간 사과 한 개의 표상과 빨간 사과 다 섯 개의 표상 또는 무수한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의 표상등은 표상이라는 형식상 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상으로는 서로 상이하다. 이처럼 관념 자체가 지닌 상이한 내용성, 그 관념적 사태 자체를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의 용어를 따라 그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이라고 칭한다.18)
의식의 양태로서는 모든 관념의 형식이 다 의식 내재적일 뿐이며, 그런 형식 상의 근거는 의식 자체, 사유자 자체 안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관념의 상이한 내용, 그 차별적인 객관적 실재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관념의 내용 자체가 표현하는 객관적 실재성에 대해, 그런 관념을 일으킨 관념의 원인 이 포함하는 실재성을 데카르트는 다시 스콜라철학적 개념에 따라 "형상적 실재 성"이라고 칭한다. 문제는 내가 가지는 갖가지 관념에 대해 그 원인은 과연 무 엇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는 일체의 관념이 다 나 자신을 원인으로 한 것 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판단될 경우 나는 영원히 나의 관념세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넘어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내가 가지는 어떤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을 경우, 나는 그 관념의 원인으로서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나는 나의 관념 밖의 다른 실재의 인정에 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채택하는 또 다른 원리는 바로 "작 용하는 원인 안에는 그 원인의 결과보다 같거나 더 많은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 는 "자연의 빛"에 따른 원칙이다. 19) 이것은 무에서는 무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원인 안에 없던 실재성이 결과에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이 나에 대해 내가 가지는 나 자신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 보다 클 경우,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 관념의 원인 은 그 자체 나 보다 더 많은 형상적 실재성을 지니는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밖의 다른 것의 실재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해 내가 가 지는 관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관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의 다소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물질적 사물에 있어 감각적 관념들은 명석판명하기 보다는 혼탁하고 혼동되어 있다.20) 그 관념들이 참이라고 해도 그런 관념들의 실재성은 명석판명한 나 자신의 관념 보다 실재성이 더 적다. 또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무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 며, 그 무는 내 안의 결핍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런 관념들은 다 나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가 있다. 물질적 사물의 명석판명한 이성적 관념, 실 체, 지속, 수, 양등 역시 나 자신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나 자신이 실체이고, 그 이외의 관념은 다 이 실체의 양태이므로, 실체인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를 들어 사과 다섯알의 관념의 객관 적 실재성이 사과 한알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 보다 더 크므로, 따라서 나는 사과 한알을 관념 밖의 형상적 실재성으로서 상정함이 없이도 사과 다섯알의 관 념을 통해 사과 한알의 관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2. 신 존재 증명
그러나 신의 관념이 포함하는 객관적 실재성, 즉 무한성, 자립성, 전지, 전능 등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사유적 실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넘어선다.21) 그러므로 나 자신이 신의 관념의 원인일 수가 없다. 더 적은 실재성의 내가 원인이 되어 더 많은 실재성의 신의 관념을 결과로 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가 지는 신의 관념의 원인은 나보다 더 많은 형상적 실재성의 신 자신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유한자로서의 나로부터 무한자로서의 신 관념이 형성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간이 유한하므로 그 반대로서 무한자의 관념을 떠올리게 되고 그 관념을 실체화하여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렇게 되면 무한자의 관념에 대해 유한한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를 그 관념의 원인으로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신은 유한한 인간이 소망하는 바의 투사가 되며, 무한의 관념은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서 지각되는 내용적 허위일 뿐이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무한자의 관념이 인간의 유한성의 의식에서 비로 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의 유한성의 의식 자체가 무한자의 관념에 비추어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한성의 관념이 전제되지 않 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의식할 수가 있겠는가? 완전 성의 관념이 있어야 그에 비추어 결핍의 의식이 가능하고, 확실성의 관념이 있 어야 그에 비추어 불확실성의 의식이 가능하고, 행복의 관념이 있어야 그에 비 추어 불행의 의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의식하고 있다. 의심과 갈등과 욕구 등의 현상 자체가 결핍의 의식을 말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한성의 의식의 가능조건으로서 우리에겐 무한성 내지 무한자의 관념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 나아가 내가 가장 확실한 인식 이라고 얻어낸 "나는 사유하는 한 존재한다"라는 명제 조차도 인간 자신의 유한 성을 대변해준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가 나의 사유 안에서만 확인되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시간적 제한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유하는 한, 의식활동 이 있는 한에서만 나로서 존재하며, 그 사유가 멈추는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의 지속성은 나 자신에 의해서는 확보되지 않는다. 이 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신에 의한 세계와 나의 창조는 매순간 행해져야 한다는 "매순간의 창조"를 말하게 되는 근거이다. 지속적인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신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한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궁극적 존재근거로서 무한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외부세계 존재 를 논하기에 앞서 데카르트는 일단 우리가 가지는 무한자의 관념의 원인으로서 의식초월적 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신으로부터 어떻게해서 외부세 계 존재 증명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3. 외부세계 존재 증명
데카르트는 우리의 관념 너머의 신의 존재를 먼저 확립하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존재하는 신에 근거하여 외부세계를 증명한다. 우리가 감성을 통해 갖게 되는 관념들의 내용은 연장성이지 사유성이 아니다. 즉 우리는 관념 들 자체를 그 내용에 따라 사유성과 연장성으로서 구분할 수 있는데, 감성적으 로 주어진 관념들은 연장성, 즉 색과 크기와 모양 등을 가지는 것으로서 주어지 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 관념이 실제로 사유하는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면, 그 관념이 사유성이 아니고 연장성의 내용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 전체 가 하나의 공통적인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그것이 나 자신으로 부터 만들어지는 내적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외적으로 얻어진 수동적 표상? 인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착각 속에 산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가 그런 착각 속에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인류 전체의 정신이 본래 그런 착각하는 정신으로서 창조된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즉 인간 정신 을 창조하는 신이 인간 정신을 그처럼 영원한 착각 속에 살도록 만든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신이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남을 착각하게 하거나 속이는 것 역시 비성실성과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것인바, 전지 전능의 완전성을 지닌 신, 성실한 신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의 완전성과 성실함에 비추어볼 때, 인 간 정신이 본래 그런 공통적 착각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일은 있을 수 없 다. 결국 신의 성실성이 우리 정신의 영원한 착각된 삶을 배제하며, 이는 곧 우 리가 실재에 대해 가지는 관념 그대로 실재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즉 우리가 이성과 구분하여 감성을 관념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능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재 자체가 우리의 감성에 관념을 제공하는 객관 세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의 성실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감성 대상인 외 부세계는 객관적 사물 세계, 연장적 본질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신을 매개로하여 확보되는 외적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인간 주관의 사유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연장적 사물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사유성 내지 정신성이 배제된 세계, 순수하게 연장성만을 그 본 질로 하는 자연은 어떤 자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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