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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Humanities

유가철학의 자아관

by Moonshot Luxury 2016. 11. 13.




유가철학의 자아관


수양의 문제


수신인가, 수심인가?







문제의 제기

 

정신 (mind, spirit, soul)과 물질 (body, matter), 즉 마음 (mind)과 몸 (body)의 문제는 유사이래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문제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아왔다. , 인간은 오랫동안 마음과 몸의 두 요소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 왔기에 이 두 가지의 상호관련성은 인간이 무엇인지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여왔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관계문제에 대한 이론들은 실로 인간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의 형이상학적, 종교적 물음은 물론이고,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윤리적 물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다양한 대답을 제공하여 왔다.

 

서구 근세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을 구성해온 것으로 믿어져온 몸과 마음을 두 가지 실체 (substance)로 규정함으로써 마음과 몸의 관계, 그리고 자아관에 있어서 강력한 하나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에 의하면 물질, 즉 몸의 속성은 연장 (extension)이고, 정신 즉 마음의 속성은 사유 (thought)로서 이들간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결고리가 없으며, 따라서 그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착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상이한 두 실체 중에서 특히 마음을 강조하여, 인간을 사유하는 실체 (thinking substance)로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몸에 대한 정신의 우위성을 한층 공고화하였다. 이 때문에 데까르트 이래의 철학자들은 데까르트에 의해 시작된 몸과 마음의 이분성 (dualism)을 극복하는 과제와 또 몸에 대한 마음의 지나친 우위성을 극복하는 과제를 떠 안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정신 (, , 등등으로 표현됨)과 육체 (, , , , 등등으로 표현됨)의 이중구조는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또한 서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결합으로 생각되어졌고, 나아가 몸에 대한 마음의 우위성도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처럼 몸과 마음의 관계가 상호 배타적 실체들의 관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특유의 물질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에너지로 번역될 수 있는 라는 근본적 물질이 이른바 몸과 마음을 실질적으로 구성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들에게 있어 몸과 마음은 상이한 실체가 아니라 의 다른 양태일 뿐이었다. 즉 몸을 나타내는 , , , 등이 다 이고, 마음을 나타내는 , , 등도 역시 라는 것이다. 이런 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삶은 가 모여있는 것이고, 죽음은 가 흩어지는 것 (죽음은 모든 기가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形氣의 몸이 흩어지는 것이고, 영혼으로 볼 수 있는 魂氣는 한동안 그 정체성이 유지되다가 결국에는 이것도 흩어지는 것으로 보았다.)일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인간의 몸의 상태와 인간의 마음상태도 자연스럽게 의 상태로 설명이 되어졌다. 동아시아 最古의 체계적 의학서인 黃帝內經을 보면 의 상태를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사이의 상호작용이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성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상태는 五臟六腑와 같은 몸의 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와 몸의 상태는 다시 의 운행상태로 설명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의 긴밀한 연결성은 바로 그것들이 동일하게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와 같이 몸과 마음의 상호연관성을 강조되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세계관은 自我觀에 있어서도 서구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크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아시아에서 自我이나 등으로 표시될 수 있는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글자들이 바로 몸을 가리키는 글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아를 비연장적인 영혼이나 마음으로 여기지 않고, 구체적인 시공을 차지하는 몸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수양을 의미하는 표현들도 몸을 닦는다’ (修身)몸을 완성한다’ (成己) 등과 같이 한결같이 몸과 자아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몸과 마음의 상호 연계성 나아가 자아를 몸으로 표현하는 동아시아에서도 몸에 대한 마음의 우위성이 여전히 크게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道敎의 수련법에서와 같이 몸 ()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도가나 유가에서도 를 기르는’ (養氣) 방법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고는 단순히 몸을 단련하고, 를 기르는 차원을 넘어, 마음의 역할을 크게 강조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마음이 가진 자발성 때문이다. 마음의 자발성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피동적인 존재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몸과 마음에 관한 이런 두 가지 대조적 태도는 두 가지 상이한 자아관을 낳았다. 특별히 유학에서 자아는 두 가지 의미를 띠는데, 克己復禮 (자신을 극복하여 예법을 실천한다)에서 보이는 극복해야 될 존재로서의 자아가 부정적 자아라면, 修己安人 (자신을 닦아서 세상사람들을 편안케 한다)이나 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해야한다는 주장에서 보이는 닦아 완성해야 (成己) 될 목표로서의 자아는 긍정적 자아이다.


그러나 몸이나 마음을 선별적으로 강조하는 태도들은 몸과 마음의 상호연계성이라는 대 원칙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몸이나 마음의 선별적 강조는 단지 강조점의 차이이다. 몸과 마음이 이질적 실체로 분리되지 않았던 동아시아 사유에서는 수양의 문제가 단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주장되어도 그것이 단지 육체와는 상관없는 심리적 태도의 바로잡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몸에 익힘 (體之於身) 즉 습관으로 익혀진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니 니 하는 미덕들도 단순히 육체와는 관계없는 마음 속의 심리상태(실천이 잘 안되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실천이 가능하게 좋은 습관으로 굳어진 상태 즉 몸에 익혀진 상태 (실천이 되는 마음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몸에 대한 마음의 우선성은 마음의 자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뿐 그것이 몸과는 상관이 없는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몸을 강조하는 수양방법을 옹호했다고 해도 그것이 마음과는 관련 없는 육체의 강조는 아니었다. 몸을 단련해서 얻는 마음의 평화는 언제나 중요한 목적이었다. 몸을 강조했던 이유는 그것이 마음에만 그쳐서는 안됨을 의미했지,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 텍스트


동양적인 자아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다음의 네 개 텍스트를 음미해보자.


A: 無極이면서 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을 낳고, 그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된다. (태극이) 고요해져서 을 낳고, 그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되어 번갈아든다. (태극은) 으로 나뉘고 으로 나뉘어져 兩儀 (두 모습)가 세워진다. 이 변하고 이 그에 결합하여져서 五行을 낳는다. 다섯 가 순조롭게 퍼져서 사계절 (四時)이 운행된다. 五行은 하나의 陰陽이다. 陰陽은 하나의 太極이다. 太極은 본래 無極이다. 五行이 생기게 되면 각각 자기의 본성을 갖게 된다. 無極의 참된 원리와 ()二五 (陰陽 五行)의 정수가 묘합하여 응결된다. 乾道이 되고, 坤道가 된다. 두 힘이 서로 감응되어 만물을 변화, 생성케한다. (이렇게) 만물이 낳고 또 낳아져서 그 변화가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신령하다. 형체 ()가 이미 생겨났으니, 정신 ()이 앎을 드러낸다. 五官이 감응하여 움직여져서 선악의 분별이 생기고, 만사가 생겨난다. 성인은 자신을 中正仁義로서 고정시켜 놓고, 고요함을 주 요소로 삼아 人極 (사람이 따라야할 표준)을 세운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해와 달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계절과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그것을 닦아서 길하고, 소인은 그것을 거슬러서 흉하다. 그러므로 하늘이 세운 길을 일러 음과 양 (陰陽)이라 하고, 땅이 세운 길을 일러 부드러움과 굳셈 (柔剛)이라 하며, 사람이 세운 길을 일러 어짊과 의로움 (仁義)이라한다.... (태극도설)

 

B: 이른바 자신 닦는 것’ (몸을 닦는 것, 修身)그 마음을 바로 잡는데 있다’ (正心)는 것은, 마음에 분노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며,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자신 ()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로 잡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학)

 

C: 공도자가 물었다. “똑 같이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며,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맹자가 말씀하셨다. ”大體 (마음)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小體 (육체)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이다. (공도자가 다시 물었다.) “똑 같이 사람인데, 어떤 이는 그 大體를 따르며, 어떤 이는 그 小體를 따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맹자가 말씀하셨다) ”귀와 눈의 기관 (육체와 관련이 있는 감각기관) 은 생각하지 못하여 (, 자발적이지 못하여) 물질에 가리어지니 (, 수동적이 되니), 물질과 물질이 교류하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다. 마음의 기관은 생각할 수 있으니 생각하면 (바른 도리를) 얻고, 생각하지 못하면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한다. 이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니, 먼저 그 큰 것 (마음)에 선다면 그 작은 것 (육체)이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大人이 되는 것일 뿐이다. (맹자)

 

D: 일찍이 논하건대, (마음)虛靈知覺 (텅 비고 신령한 지각능력)은 하나일 뿐인데, 人心 (보통 사람의 마음) 道心 (도덕적 마음)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하나는 形氣 (형체, 육체)의 사사로움 (치우침)에서 생겨나고, 하나는 性命 (도덕적 본성)의 올바름 (공평함)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하는 방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는 (, 人心) 위태로워 편안치 못하고, 하나는 (, 道心)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비록 上智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라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도덕적) 본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下愚 (아주 어리석은 자)라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方寸 (마음)의 사이에 섞여있는데, 그것을 다스릴 바를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해져서 天理 (도덕법칙)의 공평함이 끝내 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밀함)은 두 가지의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하나로 함)은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니, 조금도 그치지 않고, 이러한 일들에 종사하여, 반드시 道心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여, 人心이 매양 그 명령을 듣게 하면, 위태로운 것이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어, 움직이고, 쉬며, 말하고 행하는 것들이 스스로 넘치고 모자라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중용장구)

 




논리적 분석과 비판

 

A는 주돈이의 태극도설로 성리학의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희는 비록 이것을 그의 형이상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일종의 氣論的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어떻게 미분화된 에너지인 無極이나 太極으로부터 인간과 만물, 나아가 도덕이 생겼는지를 그려내주고 있다. 여기서 만물은 물론 인간과 성인 (도덕)의 출현들도 자못 기계적인 우주론적 생성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1. 무극, 태극, 음양, 오행의 순서로 분화되었다.

2. 오행은 남녀의 원리에 입각해 만물을 생성한다.

3. 사람이 생기고, 선악이 나뉘어진다.

4. 성인과 가치의 표준이 생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도덕성이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도덕의 자율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나? 인간의 도덕적 수양의 필요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따르면 그것은 無極이나 太極, 아니 陰陽 五行과 같은 의 운동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도대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되고, 도덕성을 성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A와 같은,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의 우주론이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가의 우주론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 수양을 통해 세상에 질서를 가져다 주는’ (內聖外王, 修己治人) 聖人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자들 특히 성리학자들은 비록 불교나 도교의 우주론과 형이상학 이론을 받아들여 理氣論이라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나름대로의 유가적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건설하게 되지만, 실제 그들에게 있어 그러한 형이상학적 체계들은 다만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그들의 학문은 스스로 實學’ (실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데 있었으므로, 그들이 단순히 세계를 의 분화과정 혹은 운동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A의 글이 바로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B, C, D는 바로 성리학자들에게 관심 있는 문제 즉 우리가 어떻게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가의 도덕 실천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마음이다. 성리학자들은 마음이 비록 의 운동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몸과 마음에 대한 氣論的 형이상학체계를 건립하였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 마음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수양론의 길로 나아갔다. 즉 그들은 성인과 도덕성을 단지 기의 운행의 상태로 다루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 태도는 수양과 실천에의 관심과는 잘 매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는 바로 유명한 대학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국가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구절 중에 자신을 닦음, 곧 자기수양이 마음을 바로 잡는 것에 있다‘ (修身在正其心)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 ()이 바로 을 나타내는 글자라서 우리는 자기 수양을 종종 자기 몸을 단련하는 것만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B의 글은 수신에 있어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 修身이라는 표현은 자기수양의 의미에 몸이 갖는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하겠으나, B의 글은 修身에 있어서도 마음의 우위성은 여전히 견지됨을 보여준다.

 

C의 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의 우위성을 찾아볼 수 있다. C에서 맹자는 大體 (큰 몸, 정신)小體 (작은 몸, 육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몸과 마음의 갈등관계, 그리고 몸에 대한 마음의 우위성을 그려내고 있다. 맹자에게 있어, 몸은 대체로 도덕성과 대비되는 사사로운 욕망의 근원이고, 반면 마음은 도덕성의 근원이었으므로, 그는 小體大體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사사로운 욕망과 공정한 도덕성의 차이 내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위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맹자는 대체를 버리고 소체를 따르는 것을 물질과 물질이 교류하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다즉 육체와 外物 간의 인력작용이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소체를 버리고 대체를 따르는 것은 이러한 육체와 외물 간의 인력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맹자는 마치 마음을 사용할 수 없는 동물은 단지 외부의 자극에 대해 기계적인 반응을 보일 뿐인 반면,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외부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극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 같다. 보통사람이나 성인이나 모두가 육체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른 사사로운 욕심이 없을 수 없으므로 보통사람이나 성인의 차이는 바로 육체에 대한 마음의 통솔력이 제대로 행사될 수 있느냐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육체는 이처럼 사사로운 욕심의 근원이다. 물론 정약용과 같은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단순히 육체 (形軀) 때문에만 욕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마음을 잘 못써서 그렇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즉 사사로움이 단지 육체에만 기원한다는 생각을 부인하지만), 그도 역시 육체가 우리 사사로운 욕심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인정하고 있다.

 

같은 관점이 D의 글에서 표현되고 있다. 주희는 맹자대학의 글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심적인 수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라고 하였는데,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이를 철저히 받아들여 독서나 기타 예법의 실천문제에 있어서까지 그 목적이 원래의 선한 마음을 밝히고, 보존하는 것’ (存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을 밝힌다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정직하게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인가? 여기서 주희는 人心道心 즉 사사로운 이기적 마음과 공평한 도덕적 마음의 구분에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주자에 의하면,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人心 즉 사사로운 마음,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러한 마음,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자가 이란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을 실천함’ (克己復禮)이라고 했을 때의 자기가 바로 이 人心에 기초한 自我라면, 주희가 밝히려한 마음은 바로 그러한 인심을 극복하여 예법을 실천함으로써 이룩해낸 최종적인 의 마음이다. 한마디로 인심 즉 사사로운 이기적 마음을 억제하고, 원래의 도심 즉 공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마음을 밝히는 것이라 본 것이다. 사적인 마음과 공적인 마음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논어의 구절들에서 암시된다. 공자는 오직 의 도덕성을 성취한 사람 (仁者)이라야 사람을 좋아하며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 원한은 은혜로 갚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정직함으로써 갚아야 된다” (以直報怨)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마음상태를 그저 보통사람의 마음상태 (人心)로 이해하면 왜 공자가 仁者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했는지, 또 왜 원한은 은혜로 갚는 것보다는 정직으로 갚으라고 했는지가 잘 이해가 안 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仁者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을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은 힘들어도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닌가? 원한을 은혜로 포용하는 것은 어려워도,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주희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공자가 강조한 태도는 이와 같은 사사로운 마음, 감정의 표출이 아니고, 바로 공적인 마음임을 강조한다. 공적인 마음이란 정당한 감정 즉 마땅히 미워할 만 해서 미워하고, 마땅히 좋아할 만 해서 좋아하는 마음상태이다. 이러한 마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지는 마음 상태라기 보다는, 도덕적 법칙에 기반한 훈련을 거쳐 이루어진 성숙된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네 개의 텍스트를 요약해보면, 맹자와 공자의 유학자들은 몸을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마음만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또 그들은 몸의 메카니즘과는 다른 마음의 독특한 영역만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데로 동아시아사람들은 육신과 분리된 의미의 독자적 심적 상태를 강조하지 않았고, 항상 육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마음의 상태를 강조하였다. 예컨대, 공자가 강조한 이라는 공적 마음상태는 결코 육신과 독립된 마음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오랜 동안 (사사로운 욕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을 버리고, 예법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갖추게 된 최종적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을 실천함이 이다’ (克己復禮爲仁)의 의미가 될 것이다.

 


의미와 함축

 

동아시아 修養論에서 몸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자유와 자발성의 실현을 제약함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의 實現處로서의 의미이다. 몸은 마음의 자발성, 초월성을 제약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자발성을 실현시키는 장이다. 성리학은 몸의 제약적 의미를 몸에 대한 마음의 우선성, 우위성을 강조하는 正心 (마음을 바로잡음), 存心 (본마음을 보존함) 등의 개념을 통해 전개했고, 몸이 가진 실현처로서의 긍정적 의미는 修身 (몸을 닦음), 體之於身 (몸에서 익힘) 등의 개념을 통해 전개했다.

 

위와 같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생각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혹은 자연과 자유, 나아가 규율과 자유의 문제들과 연계해서 어떠한 시사점을 줄까? 동아시아 사람들도 자연 법칙, 사회 규율 등이 심각하게 인간의 자유성, 창조성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다시 말해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자연과 자유, 규율과 자유사이에는 심각한 갈등관계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그러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요소들 즉 자연법칙과 사회적 규율들이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구현하는 장이라는 생각도 잊지 않았다. 육체는 틀림없이 우리의 마음의 자발성을 위협하는 요소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이 육체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자발성이 구현되는 것처럼, 자연과 규율은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실현도 시켜준다고 본 것이다


동아시아 철학은 말한다. 진정한 자아의 완성은 몸의 완성 (修身, 爲己, 成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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