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플라톤의 배경과 이데아론(the theory of Ideas)
아테네 사람들에게 기원전 5세기 말엽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선동 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이 긴 세월 두루두루 설치고 다녔기 때문에, 아무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시대요, 혼돈의 시대였다. 윤리 정치적인 혼란이 판치는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리고 자연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편적인 것을 윤리적 문제에서 찾았으며, 처음으로 정의(justice)라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확립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이어 받아 질서를 잡아주고, 절대적인 기준의 제시와 증명을 시도하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497? B. C.)에 있어서 수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당시 그리스 사상과는 다른 독창적이고 어느 정도 엄밀성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은 주로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 C.),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 및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피타고라스에게서 궁극적인 것은 물질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라는 것을,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실재는 불변의 영원한 것이요 변화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감각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환사에 불과함을,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만물유전설, 즉 현상계의 모든 것은 하나도 제자리에 있지 않고 부단히 변전한다는 것을,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되는 지식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어야 함을 배웠다.
이에서 플라톤은 우리의 감각이 불완전한 것이고, 현상계의 모든 것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절대적인 지식의 대상은 현상계엔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이는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으로선 파악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받아 드디어 참다운 지식의 기원과 영역을 감각과 감성계에 두지 않고 이성과 예지계에 둠으로써, 감성과 이성, 감성계와 예지계라는 이원론을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실은, 플라톤이 대화편 <국가>에서 ꡐ지식이란 감각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ꡑ 라고 한 말에 의해 명증되는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이 이원론적인 생각은 가능한가? 우리는 입장의 차이가 뚜렷한 칸트(I. Kant 1724-1804)와 러셀(B. Russell 1872-1970)에서 그것과 유사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인식의 내용이 들어오는 통로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과,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 들어온 인식의 내용이 정리되는 ꡐ틀'인 범주(category)라는 이해력의 형식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인데, 그는 이 인식의 내용을 제공하는 현상계 이외에 이를 그 배후에서 현상계 되게 하는 존재근거로서의 물 자체의 세계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러셀 역시 우리의 감각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을 감각자료 즉 현상이라 했고, 이 감각자료를 일으키게 하는 그 무엇을 실재라 함으로써 이 둘을 갈라 보았으며, 덧붙여 그는 감각자료 즉 대상의 성질은 대상을 설명할 수 는 있으되 그것들을 아무리 결합해도 대상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실재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칸트의 물자체는 이성의 요청에 의한 것이요, 러셀의 실재는 그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이긴 하나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실재와 현상으로 분리하여 보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현상과 실재의 분리가 가능한 일이란 것과 ?사물 그 자체? 즉 실재란 우리의 감관에 의하여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서만 사유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러면 이 사실을 플라톤에서 좀 더 고증해 보자. 대화편 <국가(Republic)>에서 플라톤은 지식의 문제를 철학자의 정의에서 발단시키고 있는데, 그는 먼저 '철학자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서, 곧 이어 그는 여기서 말한 사랑이란 호기심과는 판이한 것이라 했다. 사랑은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함이고, 호기심은 한갓 사물의 외모를 좋아함에 불과한 곳이라고 했다. 전자는 지식을 갖고 있다면, 후자는 억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지식을 갖는다고 할 때 그 지식은 무엇에 관한 것일 것이요, 대상이 없을 때 그것은 무지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가 대화편 <국가>에서 ꡐ존재(being)는 지식의 대상이요, 비존재(not-being)는 무지의 대상ꡑ이라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관여하지 않고 그 중간에 위치하는 것을 억견이라 하여 우리가 경험계에서 감성을 통하여 얻는 소위 경험적 지식이란 이 억견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억견이란 무지보다는 분명하지만 지식보다는 애매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억견이란 현상계의 사물에 대한 지각이요, 지식은 예지계의 실재에 대한 사유인 것이다. 예컨대 억견은 아름다운 개개의 사물에 관한 것이요, 지식은 미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억견은 부단히 변전하는 개체에 대한 지각이기 때문에 그릇되기 쉬운 것이요, 지식은 불변의 실재에 관한 사유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라 하겠다. 플라톤은 모든 대화편에서 억견과 인식에 대하여 절대적인 구별을 짓는데, 억견은 아무리 훌륭해도 개연성의 테두리를 넘지 못하며, 인식은 아무리 못해도 절대 확실하다고 했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무엇에 관한 인식인 이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인식의 대상으로 되는 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이 무엇인가를 자연학적인 의미에서 묻는다는 것은, 물질적 질료적인 아르케(Arche)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아르케를 물로 생각하더라도 또는 불로 생각하더라도, 또는 그 밖의 많은 원질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질료적인 아르케 속에 사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에 의하면, 정의는 비물질적 비질료적인 것이다.
정의의 본질, 정의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따라서 도덕에 관한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그 대상으로서, 자연학적 인식의 대상이었던 자연과는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른 종류의 존재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이와 같은 것을 이데아(Idea) 또는 형상(form, eidos)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데아만이 참다운 것이요, 구체적 대상이란 하나도 참된 것이 아니다?라 하여 이데아가 불변적이고 추상적이며 참다운 것으로 설명하였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만이 실재적이라는 생각에 젖어온 사람들의 선입견에 대하여 플라톤이 반대를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반대해서 언제나 그는 모든 대상들 가운데에서 이데아야말로 실재적이라는 술어로 표현될 자격이 가장 많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데아는 개별자들이 영원한 완전성을 손상함이 없이 그것의 실재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대상이다. 정리하면, 현상의 배후엔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재 즉 이데아로 구성된 이데아계가 있으며 그 이데아는 불변의 것이요, 추상적인 것이며, 신뢰할 수 있고 참다운 것이라는 암시를 받았다. 이데아는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사유되어질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ꡐ개체들은 지각되지만 이데아는 사유되어질 뿐이다ꡑ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에 관한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감각의 도움은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든가, 개체들은 보여지지만 알려지지 아니하고 이데아는 알려지지만 보여지지 않는다고 한 플라톤의 주장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가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개별자와 이데아 사이의 관계는 플라톤이 꾸준히 노력을 경주한 대상이었다. 속인들은 모래밭 위에다 여러 가지 원을 그린다. 그러나 기하학자는 진정한 원을 다룬다. 속인들은 한 옥타브의 음을 내기 위해서 악기의 두 현을 조절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음악가는 두 현이 만일 꼭 같은 정도로 팽팽하다면, 길이에 있어서 2:1의 고정된 비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속인들은 어떤 사람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정의 본성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플라톤은 참다운 예술가는 모방하는 이가 아니라 실재에 관심을 갖는 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위대한 예술은 모두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그 대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본질 즉 대상의 이데아를 제시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개별자는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고 플라톤은 늘 말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데아는 개별자들이 다소라도 타당하게 모방하려는 이상을 밝혀주는 것이다. 원의 이데아는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원에 가까운 원형은 무수히 많다. 정의의 이데아는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다소라도 올바른 인간은 무수히 많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은 우리가 개별자로부터의 일반화에 의해서 이데아의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개별자들이 아무리 적합한 이데아의 필요조건에 접근해 간다고 하더라도, 이데아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을 남김없이 구현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자를 본다든가 또는 그 밖의 양식으로 감각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을 자극하여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데아는 우리가 보던가 듣던가 감각하는 개별자들 가운데의 하나는 결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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